1907 대부흥 운동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3.05.20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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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평양 대부흥운동의 배경(사회적 배경/교회적 배경)
● 평양 대부흥운동의 진행과정(원산기도회/평양사경회/평양대부흥 이후의 부흥운동)
● 평양 대부흥운동의 성격
● 평양 대부흥운동의 의의(긍정적 평가/부정적 평가)
● 결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사회적 배경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은 급격한 변화와 극심한 혼란의 시기를 겪는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집권층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외세를 끌어들였고, 서구열강들의 압박에 대해 외교는 미숙하고 원칙 없이 이루어졌다.
한편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에서 연달아 승리한 일본은 1904년 한국에 군대를 파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간다. 1905년에는 가츠라-테프트 메모 일본과 미국 간에 체결한 밀약.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에 조인하고, 같은 해 11월 결국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1907년에는 정미조약을 통해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국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러한 일제의 침탈에 반발해 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은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실효는 없었다.
한편 조선말 60년간의 세도정치가운데 사회에는 부패가 만연하였다. 뇌물수수와 매관매직이 횡행했으며 관료들은 백성을 착취하는데 열중했다. 경작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이 급격히 증가했고, 기본적인 의식주의 해결이 어려워지자 곳곳에 민란이 발생하고 도적떼가 출현했다. 평양의 경우 지방보다 그 정도가 심해 “시민은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하루를 연장하고 있는 상태”로 묘사될 정도였다.
이에 더하여 외세의 경제적 착취가 이어졌다. 철도, 어업, 금광 등 중요 개발사업들은 모두 외국자본에 넘어갔고, 일본은 1905년 화폐정리에 착수해 조선 금융계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시대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현실도피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아편과 술, 담배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이처럼 19세기말-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이 혼란했으며, 국민들은 무력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혀간다.
참고 자료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신대출판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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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찬희, “평양대부흥과 성령”, 고신대학교, 2007.
강명국, “1907년 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신앙양태 형성에 끼친 영향”, 성결대학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