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해방이후 1945년 12월까지 북한의 정치·사회적 상황
- 최초 등록일
- 2003.06.07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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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상황
1. 해방 후 정치상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2. 인민위원회의 조직화
Ⅱ. 항일무장투쟁 세력과 공산주의운동
Ⅲ.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본문내용
Ⅰ.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상황
1. 해방 후 정치상황과「건국준비위원회」조직
1945년 8월 15일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의 힘으로 한반도에 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성취된 해방이기보다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타율적 해방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 전체에 걸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정치조직이 일반적인 정당이나 정치단체들과 같이 소수의 지식인이나 엘리트들에 의해 수립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기층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이루어진 「건국준비위원회지부」와 이를 곧바로 계승한 「인민위원회」가 폭발적으로 조직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이끈 축은 일제 하에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거나 혹은 소극적이나마 저항을 했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북한의 중심지인 평양의 경우 저명한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선두로 1945년 8월 16일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곧이어 이 조직은 지하활동이나 감옥에서 벗어난 공산주의자들과 합세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칭되었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는 북한에 중앙권력기관이 들어설 때까지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들 조직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립되었고, 그 수는 무려 145개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국민대중 들이 얼마나 정치화되기 쉬운 상태에 있었는가를 잘 보여 주는 현상이다.
2.「인민위원회」의 조직화
이와 같은 현상은 북한지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과 더불어 북한지역에서 출현한 「인민위원회」 조직들은 나중에 수립되는 북한정권의 모태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북한정권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이나 공산당의 주도하에 수립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 못지 않게 「인민위원회」의 형성과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인민위원회」가 우후죽순처럼 조직화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반도가 정치화되기 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조직들이 미군정에 의해 부인되고 억압되었으나, 북한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합법화되고 지원을 받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남북한이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