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현대인을 위한 교회사-중세편)
- 최초 등록일
- 2014.07.17
- 최종 저작일
- 2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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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중세교회사의 모습보다는 어떤 주제별로 중세를 살펴보면서 그 모든 사건, 사건마다, 또는 어느 인물들마다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실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목차
1. 하나님의 집정관 : 대 그레고리
2. 통일과 연합의 추구 : 샤를마뉴와 기독교권
3. 신비한 방법으로 드리우다 : 교황제와 십자군 원정
4. 학문의 신주(神酒) : 스콜라 철학
5. 청빈이라는 귀부인에게 바친 송가 : 사도적 생활 태도의 복구
6. 잠자는 인간들과 필요의 법칙 : 교황제의 타락
7. 역사 과정의 심판 : 위클리프와 후스
8. 비평
본문내용
로마를 덮친 흑사병은 교황이라고 해서 그냥 피해가지 아니하고 펠라기우스 2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후에 590년 9월 3일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 그레고리를 정식 임명하였다. 그는 위대한 기품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는 뛰어난 행정능력과 인간에 대한 따스한 사랑을 겸비하여“대 그리고리(Gregory the Great)”라고 칭할 정도였으며 그의 묘비에는“하나님의 집정관(Consul of God)”라고 새겨졌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스스로의 모든 것을 다 바쳤던 동시에, 교회와 세상을 마치 정치가처럼 다스리고 관리하였던 인물에게 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 략>
인간들의 업적은 시간의 심판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중세 이후 교황제가 바로 이러한 심판의 대상이 된 체제로서, 이 심판의 대상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체제 자체임을 나타낸다. 두 사람의 용기있는 신자들,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와 체코인 존 후스(John Hus)가, 기독교회는 교황이 수장으로서 이끄는 바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상의 조직체 이상의 것이라는 사상을 감히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존 위클리프는 열심당이라 할 수 있는 인물로서 중립이나 온건 노선을 경멸하였다. 당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재배권 혹은 통솔권의 소재 문제였다. 그는 영국 정부가 하나님으로부터 국가 영역 안에 있는 교회의 부정을 고치고, 계속 죄를 범하는 성직자들을 사임시켜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 운동과 연계되었다는데에 중요성이 있다. 교황제에 관한 그의 초기 사상은 그가 강조하였던 사도적 청빈의 관점에서 결정되었다. 그는 권력의 각종 치장들을 경멸하였다.
참고 자료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