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에 대한 자료
- 최초 등록일
- 2019.12.04
- 최종 저작일
-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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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가 장준하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장준하의 생애
1) 유년기
2) 청년기
3) 광복 이후
4) 생애 후반
2. 장준하의 활동
1) 관료, 언론 활동
2) 정치 활동
본문내용
● 유년기
1920년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의주군을 떠나 삭주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장석인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대관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1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갔다. 1933년 삭주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였다.
그 후 아버지 장석인이 선천 신성중학교의 교목이 되자 장준하는 아버지를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7년 신성중학교 교장 장이욱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자, 이에 장준하는 학생대표를 동원하여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시위 운동을 전개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 청년기
1.일본군 입대와 탈출
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기차역까지 마중나가 전송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그는 김창정 등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최기일을 전송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입대. 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장준하의 일군 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후일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어떤 뜻을 품었는지 일본군에 입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장준하 역시 자신이 자원입대했다고 밝혔다. 자원입대한 이유를 그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혔다.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다녔던 장선생은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왜정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학병을 기피하면 자신의 약혼자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등 가족과 주변에 에 가할 탄압 때문에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학병으로 지원한 다음 중국에만 파견되면 일군을 탈출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편입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