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중국현대사 내용정리
- 최초 등록일
- 2021.05.06
- 최종 저작일
-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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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 현대사를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목차
1. 제1, 2차 중영전쟁
2. 태평천국운동
3. 양무운동
4. 변법운동과 입헌운동
5. 신해혁명
6. 5.4 운동
7. 제1차 국공합작
8. 제2차 국공합작
본문내용
제1, 2차 중・영전쟁
-청조의 변화와 영국의 아시아 진출
청조는 건륭제 중기 이후 태평성세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제체제하에서 권력이 황제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다 보니 관료의 약화로 인한 행정 능률 침체 현상이 발생했다. 더불어 사치풍조와 부패가 만연해 관리의 수탈이 극에 달하자 백성의 궁핍화가 더욱 심화됐다. 결국 청조의 쇠퇴는 빈번한 반란으로 드러났고, 이렇게 청조 사회가 안정을 잃어가자 변화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훈고학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한학 대신 변혁의 사상으로 금문학을 흥기시켰다. 또 현실을 직시하고 실제 문제를 연구하고자 하는 경세치용의 학문을 주장했다.
1600년에 설립된 이래 동방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8세기 초 모직물 등 영국 상품의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이에 중국 시장을 장악하고자 했고, 1780년대부터 동인도회사가 중국의 광동무역에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중국무역 확대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다. 가장 큰 장애는 이른바 ‘광동무역체제’였다. 광동무역체제는 무역항을 광동에 한정했고, 공행이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고 외국 상인의 무역과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제한했다. 영국은 이와 같은 광동무역체제의 타파를 통한 무역제한의 철폐와 대등한 외교교섭을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제1차 중・영전쟁(1840~1842)
중국의 수출품인 차에 대한 영국의 수요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인 데 반해 영국의 주요 수출품인 모직물은 중국인들에게 사치품이어서 수출을 증가시키기에 한계가 있었다. 19세기 초반까지 중・영 간의 무역수지는 항상 중국의 수출량이 우위였다. 영국은 차 수입에 필요한 은을 마련하기 위해 모직물이 아닌 수출대체품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중국에서는 거듭되는 아편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아편흡식 풍조가 거의 모든 계층에게 퍼져나갔다.
참고 자료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외, 서해문집,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