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초기 공화정의 혼란
- 최초 등록일
- 2023.01.15
- 최종 저작일
- 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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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화민국 초기 공화정의 혼란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화민국의 탄생과 <중화민국 임시약법>의 제정
1) <임시약법> 제정의 배경
2) 원세개의 <신약법>과 ‘홍헌제제(洪憲帝制)’
2. 군벌혼전의 전국시대
3. 신문화운동과 5·4운동
1) 신문화운동의 태동
2) 5.4운동의 발발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화민국의 탄생과 <중화민국 임시약법>의 제정
1) <임시약법> 제정의 배경
2) 원세개의 <신약법>과 ‘홍헌제제(洪憲帝制)’
2. 군벌혼전의 전국시대
3. 신문화운동과 5·4운동
1) 신문화운동의 태동
2) 5.4운동의 발발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중화민국(中華民國)은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해 청조(淸朝)정부가 붕괴함에 따라 탄생하여,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국민당의 남경 정부가 패퇴하고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수립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중국 본토를 격변의 역사로 인도하였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전제군주정의 경험을 뒤로 한 채, 최초의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 속에서 끊임없이 혁명과 反혁명이 대결하였고, 그 결과 정치·경제·문화 등등 사회 전반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먼저, 중화민국 초기 임시혁명정부의 입법기관인 참의원에서는 <중화민국임시약법>을 제정하였고 그 결과 의원내각제가 채택되었지만, 이는 정치적·군사적 규제력이 부족한 명목상의 약법일 뿐이었다. 남경정부의 영향력은 극히 일부 지방에만 국한되었고 북경에는 여전히 원세개(袁世凱)로 대표되는 북양군벌 세력이 잔존하여 남경의 혁명정권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경 정부는 내전을 피하려는 의도로 원세개에게 ‘손문(孫文)’을 잇는 제2대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지만, 이는 혁명세력이 反혁명세력에게 혁명을 맡긴 형국이었으므로 애초부터 혼란의 씨앗을 배태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원세개는 곧이어 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해 공화제를 폐지한 뒤 전제정치를 부활시켰지만 이러한 반동 정치는 금세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 각지에서는 대소군벌이 할거하고 세력싸움을 벌임으로써 군벌혼전이 전개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국가들의 침탈이 심화되어 국가의 존망이 불투명했다. 군벌들은 내전을 치르는 데에 필요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외채를 대출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이 더욱 침탈하기 쉬운 구조를 만들어주고 있었으므로 민중들의 불만은 나날이 가중되었다.
참고 자료
박준수(1996), 「‘臨時約法’體制下의 段祺瑞軍閥政權」, 동양사학연구, 53, 1996.
서진영(1992), 『중국혁명사』,한울.
오수열(2007), 「5·4운동의 발발 배경과 역사적 교훈」, 한국동북아논총 제44집, 2007.
최관장(1997), 「중국의 군벌정치 연구(1916-1928)」, 중국연구 Vol. 20, 1997.
요코야마 히로아키(2000), 『중화민국사(中華民國史)』,박종현 譯,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