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이야기(수잔 휫필드)
- 최초 등록일
- 2006.11.02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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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남대학교 영상으로보는 중국문화(허부문 교수) 시간에 실크로드 이야기(수잔 휫필드)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리포트입니다. 리포트 성적은 A+입니다.
목차
실크로드 이야기
1.서론
2.본론
1)상인이야기-나나이반타크(730-751)
2)병사이야기-세그라톤(747-790)
3)목부이야기-쿰투그(790-792)
4)공주이야기-태화공주(821-843)
5)승려이야기-춧다(855-870)
6)기생이야기-라라슈카(839-890)
7)비구니 이야기-먀오푸(880-961)
8)과부이야기-아룽(888-947)
9)관리이야기-자이펑다(883-966)
10)화가이야기-둥바오더(965)
3.결론
본문내용
2)병사이야기-세그라톤(747-790)
티베트 병사 세그라톤이 미란 근처의 요새에 배치된 것은 서기 780년대의 일이었다. 실크로드 남쪽 갈랫길에 자리잡고 있는 미란을 그의 고행에서 1,500㎞나 떨어져 있었다. 때는 수확기였다. 세그라톤은 국가의 국내외 적에 대처하기 위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여 의무적으로 병역에 참가했다. 미란은 티베트 고원에서 쿤툰 산맥을 넘는 두 개의 직통로가 동서 실크로드로 진출하는 출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그라톤이 미란에 배치되었을 때 이 수로는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분대는 관개시설 관리 장교의 지휘 하에 따라 남은 수로들이 막히지 않도록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 지난 741년 세그라톤은 중국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티베트 부대에 속해 있었고 747년 여름에는 전처럼 운이 좋지 못해 세그라톤은 그 해 전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세그라톤은 숙소의 흙벽에 막대기로 양군의 위치를 그렸다 미란요새에 배치된 병사들은 대부분 파이르 고원에서 실전을 치른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었지만 산악지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세그라톤은 벽에다 옥수스 강을 그리고 강남쪽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1천명 수비대의 위치를 표시했다. 하지만 강이 범람해 강을 건너가면서 중국군과 대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튼날 아침, 세그라톤은 시끄러운 소리와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을 깼다. 세그라톤과 동료들은 그들이 세운 방책 쪽으로 밀려났고 그의 분대원들은 대부분 죽거나 다쳤다. 그날 밤 세그라톤과 살아남은 동료들은 중국군 전열에서 허술한 틈을 찾아내어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났다. 그 후 그의 부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세그라톤은 이런 얘기를 병사들에게 했다. 병사들은 그가 탈출해 어떻게 중국군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그의 성공비결을 물어보았다. 747년의 전투가 끝난 뒤, 세그라톤은 동부전선으로 가기 전에 잠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가족과 함께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음 근무지를 행해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다른 날 저녁에 부하들은 세그라톤에게 코코노르 전투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세그라톤은 양군의 첫번째 대결을 이야기했다. 전투는 고원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계속되었지만 중국군은 티베트의 병력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에 병사들은 수집하고 뚫지 못하면 다 처형하겠다고 공포했다. 그후 중국군은 병력이 강력해졌다. 막심한 희생을 치르고 요새가 중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 후 세그라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탈영병은 무조건 처형당했다. 세그라톤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사막의 요새에서 과거의 전투를 회상하고 있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전역명령을 받았다. 드디어 병역에서 해방된 것이다. 15세 때부터 전선에 있었고 계속되는 부상에 현역으로 근무가 어려웠다. 한쪽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고 무릎관절염도 있고 말도 겨우 탈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살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미란요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세그라톤은 떠나기 전에 전쟁터를 돌아보면서 25년 동안 숱한 전투를 치르고도 살아남을 것을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의 아들도 실크로드 연변수비대에 일을 한다. 과연 그의 아들도 그처럼 운이 좋을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참고 자료
실크로드이야기(수잔휫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