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인물조사
- 최초 등록일
- 2007.09.11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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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공 레포트이고,. 에이받았습니다.
목차
Ⅰ. 서론- 선택동기
Ⅱ. 본론
사마천의 생애
사마천의 역사관
(중국인의 역사관, 사마천의 역사관)
사마천의 사상
Ⅲ. 맺음말- 느낀점
본문내용
1. 사마천의 생애
사마천은 역사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몰연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사후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반고가 지은 한서의 `사마천전`이 주요 자료라고 할 수 있는데 한서는 위 두 글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으니 결국 주요한 자료는 <태사공자서>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사기의 각 편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되는 논평부분에 자신의 행적이 조금 실려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료의 빈약함으로 인해 사마천의 출생 및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에 관한 내용은 추정을 할 뿐이다. 서한의 역사가이자 문학가, 사상가인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며, 직책인 태사령에 따라 태사공으로 통칭된다.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는 기원전 145~86년 경으로, 전한시대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는 하양사람이며, 무제 건원 6년(B.C 135) 혹은 경제 중원 5년(B.C 145) 한의 조정에 태사령(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서와 조정 의례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을 지낸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담은 천문을 맡고 있어 인민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들 천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학문으로써의 소양을 쌓기를 바라였고 사마천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많은 역사적 인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려서부터 많은 서적을 읽어내렸다. 그는 열 살 때 고문을 읽고 스무살 때 남쪽으로 양자강과 회화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의 동혈을 찾아보았으며 절강, 구의 산을 보았다. 북쪽으로 문수와 사수를 건넜으며 제와 노의 도시에서 학업을 하였고 공자의 유풍을 관찰하였으며 추의 역산에서 향사례에 참가하였다. 파·설·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하여 돌아왔다. 이 후에 천은 벼슬길에 올라 낭중이 되었으며 사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파와 촉 이남의 정벌에 참가하였고 남쪽으로 공·착·곤명을 공략하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같은 해에 한 왕실의 봉선례를 행하였으나 사마담은 주남에 머물러 이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분노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천이 마친 사명으로 돌아와 낙수와 황하 사이의 지방에 머물러 부친을 뵈었는데. 태사공이 말하길 “우리의 선조는 주왕실의 태사다. 고대로부터 공명을 드러내었고 우·하 시대에 천관의 일을 맡았으나 후에 우리가문이 쇠하여 이 전통이 나에게서 끝나려는 것이 두려우니 네가 다시 태사가 되면 우리 선조의 임무를 계승해야 한다. 지금 천자는 천년의 전통을 이어 받아 태산에 봉선례를 행하고 있는데도 나는 참가 할 수 없으니 너는 후에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라고 하였다. 그의 유언은 사마천의 가슴이 깊이 남았을 것이다. 부친의 사후 3년만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다. 그는 여러 역사기록과 석실금궤의 책을 읽었다. 5년 후, 태초 원년 11월1일 갑자일, 동지의 새벽, 천력이 비로소 시행되어 명당에 설립되었고 여러 신령은 이 해의 기록을 받아 들였다. 그 후 7년 동안 태사공은 저작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이릉사건’이라는 불운을 만나 감옥에 갇혔다. 사마천은 우정에 입각하여 정의를 주장하다 성제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에는 사형보다도 심하다는 궁형을 당했다. 궁형을 당하면 남성이 아닐뿐더러 건강도 나빠진다. 그러나 그는 역사 서술의 역사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그 치욕을 감수하고 자기의 명예와 육체를 희생한 인물이다. 이것으로 그의 역사 서술에 대한 그의 남다른 정열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의 사후에야 그의 책은 차츰차츰 세상에 나왔다. 선제때에 사마천의 외손인 평통후 양운은 그 책을 조술하여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였다. 왕망 때에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내어 사통자의 칭호를 주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