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의 경제사상
- 최초 등록일
- 2007.11.21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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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비자의 경제사상
한비자의 생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 안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
목차
한비자의 생애
법가사상
유가 대 법가
한비자의 재해석
한비자와 아담스미스
한비자와 노자
본문내용
한비자의 재해석
‘초나라에 화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초산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옥돌을 발견하여 그것을 여왕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에 여왕은 옥을 다루는 사람에게 보이니 “돌멩이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고 하여 화씨의 왼쪽 발뒤꿈치를 자르게 하였다. 그 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다시 그 옥돌을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을 다룬ㄴ 사람에게 보이니 다시 “돌멩이입니다.” 하였다. 무왕 또한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고 하여 화씨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자르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옥돌을 안고 초산 아래 사흘 낮밤에 걸쳐 통곡하였는데 눈물이 말라 피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묻기를 “세상에 발뒤꿈치를 잘린 사람이 많은데 그대는 왜 그리 슬피우는가?”하니 화씨가 대답하기를 “나는 발뒤꿈치를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값진 옥을 돌멩이라 단정하고 올곧은 선비를 속이는 자라 하니 이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옥을 다루는 자에게 그 돌을 갈아 다듬게 하였는데 과연 보물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임금은 이를 ’화씨지벽‘이라 이름하였다.
-《한비자》 화씨-
옥돌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은 바로 한비자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2200년 전의 논쟁에서 보물을 얻으려면 우선 갈고 다듬어야 한다. 옛날의 사상은 이와 같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공자도 달라졌다. 근세에 들어 서구문명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유가 사상은 일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19세기 말 중국에서 일어난 소위 변법운동은 퇴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유가의 몸부림이었다. 변법파들은 원래의 공자와 이후 역사 속의 공자를 구분했다. 원래의 공자는 “만민의 평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꿈꾼자이다.”이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유학자들은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 즉 인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을 존중한다는 인본주의를 공자사상의 핵심으로 본다.
유가사상이 민주주의로 탈바꿈하는 동안, 법가 사상은 상대적으로 제자리에 머물러왔다. 일반적으로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는 절대군주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형벌을 엄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각박한 사람들이라 여겨져왔다. 똑똑하기는 하지만, 권모술수를 능사로 여기고, 민중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이해관계만 따질 줄 알 뿐, 인.의.예와 같은 군자의 도리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유학자들은 법가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법가사상을 택한 진나라가 폭정으로 단명했음을 지적한다. 심지어 “중국 고대 철학사 중의 일대 비극이며, 문화의 커다란 액운”이라고까지 한다. 한비자를 그가 살았던 시대를 묶어놓고 본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