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종교개혁과 30년전쟁
- 최초 등록일
- 2008.06.11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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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의 종교개혁(독일농민운동) 과 30년전쟁에 관한 내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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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6세기 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시기 였다. 마루틴 루터의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 전쟁이 모두 이시기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아니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루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그가 95개조 반박문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데서부터 시작된다. 면죄부란, 이것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증표인데, 사실은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짜낸 묘안이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는 교회 벽에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의 반박문은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4주 일 만에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알려졌다.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 교황과 성직자의 부패, 타락을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이 파문을 경고했지만 루터는 교황이 보낸 칙서를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1521년 마침내 그는 파문을 당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 역시 그를 국법의 보호밖에 둔다는 선고를 내렸다. 루터는 황제의 경쟁자인 작센 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숨어 지내야 했다. 이 때 루터는 라틴 어로 쓰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이듬해 출간 했다. 이제껏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 민중들에게 널리 읽히게 된 것 이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앙의 근거는 성서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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