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나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을 뼛속까지 느끼게 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ㄷ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실수 없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ㅃㆍ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발현이란 감상의 과소비밖에 안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 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개화?신문화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25년이 되면 KAPF를 비롯한 진보적인 문예운동이 일어나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 국내는 진보적 운동이 결정타를 맞고 그 대신 남만주와 북간도에서는 항일 게릴라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우파의 문학?예술인들은 맥없이 순수예술을 주장하다가 그래도 그중 괜찮다는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 내지 자존심에서 좌파가 내세운 민족성?현실성의 가치 중 고작해서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어갔다. 그것이 문학에서 국민문학파이고 미술에서 오지호?김용준 등의 향토색 논쟁이며 김중현?김종태의 향토적 서정주의 그림이다. 그리고 음악에서 홍난파같은 작곡가를 낳았다. 속 알갱이는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겨버린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할 비전과 의지는 상실한 채 형식에서만 향토적 빛깔과 맛을 찾으면서 그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라고 믿으려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p.37-39)
선생은 이런 심각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삼화령 애기부처의 까만 발가락처럼 재미있는 소재도 소개했다. 선생은 이 삼화령 애기부처를 ‘선덕여왕 시절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유물’(p.142)이라고 표현했다. 정식 명칭은 ‘생의사 미륵삼존상’이다. 3개의 석불은 볼래 남산 삼화령 고개에 있던 것인데 지금은 경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변하는 이유를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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