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열전에서 공자는 왕도가 무너지고 사도가 흥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시경과 서경을 차례로 논하여 예악을 일으키려고 했다.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음악을 바르게 정비하자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찾았으나, 세상이 혼탁하여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이때 제후국의 군주 중에는 위문후만이 유학을 사랑했고 유학은 점점 쇠퇴하여 전국시대를 이루면서 유학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제와 노 두 나라에서만 학자들이 계속하여 나왔다. 진시황 시대에 이르자 시서를 불태우고 유가를 죽였는데, 육예는 이때 사라졌다. 진섭이 진왕이 되자 노나라의 유생들은 공자의 예기를 지니고 그의 신하가 되려고 했다. 진나라가 시서를 불태운 행동에 대한 원한을 진섭을 통해 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고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노나라에 쳐들어왔음에도 여러유생들은 예악을 익히고 노래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나라가일어나자 많은 유생들이 그들이 익혀오던 제노의 경서를 가지고 대사례나 향음례를 강습할 수 있었다. 숙손통이 태상이 되었고 함께 일한 유생과 제자들도 모두 등용되었다. 이 일로 인해 한고조는 유학의 쇠퇴에 통감하며 부흥시키려고 했다. 두태후의 죽음 후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어 백가의 학설을 배척하고 문학가와 유학가들을 초청했다. 그 중 공손홍은 춘추로서 평민의 신분에서 일약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평진후에 봉해졌다. 이로써 천하의 학문은 모두 유학에 쏠리게되었다. 공손홍이 이때 한 말들을 황제가 그대로 시행하라고 허락하자 관리들 중 문학 출신의 선비들이 많아졌다.
유영이 죽자 신공이 서미가 되었다. 신공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노나라에 돌아와 은퇴한후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상 외출을 하지 않았다. 신공의 제자들이 높은 관리가 되자 천자는 사자를 보내 신공을 현자로 초빙하여 정치에 대해 물었다. 신공은 ‘다스림이란 많은 말에 있지 않고 얼마나 힘써 행하냐에 달려있다’라고 대답한다. 당시 천자는 화려한 문장을 좋아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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