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작가이자 저술가 히토 슈타이얼의 근작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동시대 미술의 작동 방식을 파헤치고, 급진적인 이미지의 정치학을 설파한 전작 『스크린의 추방자들』에 이어, 이 책은 한 걸음 나아가 데이터 자본주의가 몰고 온 전 지구적 갈등과 모순을, 특유의 비약적 글쓰기로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인간이 만든, 그러나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현실을 규정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까지 형상화하는 동시대 ‘알고리듬적 무의식’을 좇아 데이터의 바다를 부유하는 이 책은, “예리하고, 정확하며, 예기치 못한 매혹을 선사한다.”(보리스 그로이스) 달리 말해 보자면 만약 당신이 휴대폰으로 찍은 셀카에 담긴 이미지가 정말 자기 모습이라고 믿는다면, 이 책을 권한다.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이 책의 부제는 그저 수사에 불과한 말이 아니다. 첫 번째로 실린 글 「좌대 위의 탱크」의 무대는 내전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콘스탄티노프카다. 이곳에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 집단이 옛 소련 탱크의 용도를 변경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됐던 이 탱크는 기념물 좌대에서 끌어 내려져 곧장 전장에 투입된다. 인류의 유산을 보존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동시대 내전을 위한 무기고가 된다. “박물관은 차고인가? 병기고인가? 기념물 좌대는 군사 기지인가?” “이 상황에서 20세기의 제도 비판 미술 용어를 갱신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자가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역사가 현재를 침범하고 게임 플레이어로 둔갑하는 상황에서, 슈타이얼은 이에 상응하는 미술 기관의 모델은 어쩌면 ‘면세 미술’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면세 미술’(duty free art) 역시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세금이 면제되는 미술이다. 그것은 세계 곳곳에 마련된 자유항 수장고 속에 존재한다. 제네바 자유항에 마련된 건물에 “피카소 작품 수천 점이 보관 중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기록이 다소 불투명한 관계로 아무도 정확한 숫자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의 내용물이 그 어떤 대형 미술관의 소장품에도 견줄 수 있다는 점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디론가 이동 중인 물품을 보관하는 자유항의 미술품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 동시에 항구적인 이동 상태에 있다. 조세 피난처이자 세심히 설정된 범죄 지역으로서 자유항의 면세 미술은 시간과 공간이 탈구된 동시대 미술 기관의 한 모델이 되는 한편, 내전 지대의 미술관은 난민들을 위한 대피소가 된다. 형언하기 어려운 이런 현실 앞에서 슈타이얼은 면세 미술의 개념을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의무가 없는’(have no duty) 미술, 어떤 가치를 수행하거나 재현할 의무가 없는 미술, 누구에게도 신세 지거나 봉사하지 않는 미술. 이런 미술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자율적 미술이 엘리트주의에 빠지거나 그 자체의 생산 조건을 망각하지 않았더라면 실현했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모순을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우리가 흔히 아는 미술을 벗어난다. “패턴 인식, 알고리듬 동종 선호, 파시즘과 봇 정치, 스팸 및 이메일 사기 등 철학, 경제, 군사, 공학, 예술, 사회, 대중문화를 가로지르며” 현실의 인식적 토대를 산산조각 내고 논쟁을 촉발한다. 예컨대 휴대폰이 보여 주는 당신의 모습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휴대폰 카메라가 당신의 휴대폰과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 저장된 모든 사진들은 물론, 당신 지인들이 남긴 사진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비교하고 연동함으로써 “당신이 지금 사진 찍으려 할 법한 것을 추측”해 창조한 이미지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할 거라고 휴대폰 카메라가 계산한 사진. 투기적이고 관계적이며 정치적인 사진. 이들은 전 지구적으로 순환하며 현실에 개입하고, 급기야 현실을 창조해 낸다.
슈타이얼은 멀찍이 떨어져 순환하는 이미지들의 운명을 점성하는 대신, 현기증 나는 표상의 붕괴 속으로 뛰어든다. 저자의 목표는 명확하다. “나는 이 모순을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순을 강화시키고 싶다.” 그 강화된 모순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저자는 “재현의 표면 아래 있는 조작과 착취, 정동을 폭로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행동할 수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아트 리뷰』) 역자들이 후기에서 밝힌 대로 “슈타이얼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은 데이터의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과 흡사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고 즐거운 동시에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온갖 가능성으로 이어지며 생각을 자극한다. 이 파도를 어떻게 탈지는 읽는 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