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 최초 등록일
- 2017.12.07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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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집현전의 배경
2) 집현전의 조직
3) 집현전의 기능
4) 집현전의 학사들
5) 집현전의 폐지
3. 결론
본문내용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를 잘 다스린 지혜로운 군주들은 문헌의 보고인 도서관을 설치하고 이를 통치의 지혜를 짜내는 도구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도서관이 그들 성제명왕(聖帝明王)의 제반 정책을 산출해내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성자라 불리는 세종대왕이 어느 군왕보다도 선정을 베풀고 더 큰 업적을 남긴 것도 결국은 도서관을 치세지구(治世之具)로서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여 과히 지나친 표현은 아니 될 줄 안다. 세종조(世宗朝)에 있어 지혜의 원천이었던 집현전은 당시의 문헌센터 즉 도서관적 기능을 가진 기관이었던 것이었다.
집현전의 배경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쓰게 된 것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였다.
우리나라에서 집현전이라는 관청 이름을 처음 쓰게 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6년(인종14)이다. 즉 인종은 문덕전을 수문전으로,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고쳤다. 그 후 집현전은 진현관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집현전으로 되기도 하였다. 집현전은 세조가 1456년(세조2년)에 폐지할 때까지 임금에 대한 고문 역할, 학문의 연구, 각종 서적의 편찬, 도서의 수집. 정리. 자료제공을 담당한 기구로서 조선 초기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학자 양성과 문풍 진작을 위하여 세종 2년(1420) 수문전․보문각․집현전 가운데 집현전만 남기면서 기구가 대폭 확장, 정비되었다.
집현전은 정종 때에 설치된 일이 있었고 또 태종 17년 정월에 사간원에서 상소하길, 정치를 하는 데는 나라에서 나라 일을 맡길 인재를 길러야 하는데, 수문각, 집현전, 보문각 등 이 이름뿐이지 제구실을 못하니 새로 집현전을 만들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집현전을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 때였다. 즉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토대구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손보기, 1984, 세종대왕과 집현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재철, 1978, 집현전고(集賢殿考), 한국도서관협회
이재철, 1973, 집현전의 기능에 대한 연구, 人文科學
유영옥, 1994, 집현전의 운영과 사상적 경향, 釜大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