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성격,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노동정치,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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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성격
1. 원인적 측면
2. 결과적 측면
Ⅲ.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원인
1. 장면 정권
2. 국내정세
Ⅳ.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노동정치
Ⅴ.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국가재건최고회의
1. 조직
1) 최고위원
2) 의장과 부의장
3) 상임위원회와 분과위원회
4) 소속기관
2. 기능
1) 국회의 권한행사
2) 대통령의 권한 대행
3) 행정에 관한 권한
4) 내각의 조직
5) 사법에 관한 행정권의 통제
6) 지방자치단체장의 임명
3. 회의
1) 본회의
2) 의안의 발의
3)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4) 수정동의
4. 기타
1) 비상조치법의 개정
2) 특별법의 제정
Ⅵ. 5 16쿠데타(5 16군사정변, 5 16군사혁명)의 평가
1. 긍정적인 면
2. 부정적인 면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박정희는 1940년4월에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제2기생은 만계2백40명, 일계2백40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11명은 만계에 포함되었다. 박정희의 동기생은 이한림(1군사령관, 건설부장관 역임), 김묵(육군소장 예편), 이재기(작고 육군대령 예편), 이섭준(이섭준 작고), 이병주(군내 남로당 수사 때 연루되어 숙청됨), 이상진(숙청), 안영길(숙청), 강창선(숙청), 김재풍(재북) 김원기였다. 동기생들 가운데는 5 16거사에 가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려고 한 사람이 있는데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이었다. 1기생 은 13명으로서 12명이 간도 용정에 있던 광명중학교 출신들이었다. 이 선배기수에 박정희의 5 16을 지지한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이주일(최고회의 부의장 당시 2군 참모장) 김동하(작고 해병대 소장) 윤태일(작고 육군중장, 서울시장) 박임항(작고 당시 5군단장) 방원철(당시 육군대령)이 그들이다. 김포주둔 해병여단을 이끌고 선두에서 한강을 건넜던 김윤근여단장은 만주군관학교 제6기 출신이었다.
<중 략>
박정희 시대의 군대는 이전에 비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군부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고, 군대의 안정을 위한 각종 장치가 마련되었다. ‘병역법’의 개정과 ‘군인사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의 마련과 기구의 신설은 군대의 안정을 위한 전제였다. 그 과정에서 ‘병역기피자’들, 그 중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국가적 배제인 ‘비국민화’가 진행되었다. 군대 내에서는 정훈교육이 정비되었으며,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기는 하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했다. ‘국가주의’가 과도하게 강조되었고, 때로는 군대의 잘못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군대에서와 마찬가지의 통솔방식을 민간사회에 적용했다. 그 기저에는 ‘명령에 따르는 복종의 강요’라는 군대식 운영의 원리가 작용했다. 여당에서부터 야당 및 전체 국민들을 대상으로 군대식 복종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에 반대하는 것은 ‘항명’으로 규정되었고, 이의 진압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즉 정권의 필요에 따라 군대는 정치에 개입했고,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닌 ‘정권의 군대’로 전락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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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1991) - 군사국가체제에 관한 분석 : 5.16 군사쿠테타가 국가성격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노영기(2006) - 5·16,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손호철(1991) - 5·16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한국역사연구회
신종대(2010) - 5.16 쿠데타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대응, 청계사학회
윤종구(1995) -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의 비교분석, 서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