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VS신윤복
- 최초 등록일
- 2003.01.04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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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홍도 와 신윤복 비교분석.
목차
◎김홍도(金弘道) 1760(영조 36)~?
1. 출신
2. 김홍도의 삶
3. 김홍도의 이름과 자, 호
4. 단원의 외모, 성격
◎신윤복申潤福 1758(영조 34)~?
1.출신, 삶
2. 신윤복의 그림
김홍도VS 신윤복
본문내용
◎김홍도(金弘道) 1760(영조 36)~?
1. 출신
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단원(檀園)이다. 예로부터 안산은 문화적 토양이 매우 비옥했던 고장이었다. 18세기 영․정조시대에 이곳은 학문과 예술의 향훈(香薰)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홍도는 영조 36년(1760) 김해 김씨 김진창의 증손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여겨진다.
그가 그림에 입문한 건 궁중화원 김응환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김응환은 김홍도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김득신의 작은 아버지다. 김홍도 보다 18살이 많던 김응환이 왕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내외금강 도〉를 그려 바친 일이 있다. 당시 김홍도는 김응환에게 사사 중이 어서 같이 금강산에 들어갔고 거기서 산수화의 기초를 배웠으리라 짐작한다. 30세가 되어선 김응환 대신 일본의 지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치기도 했다. 김응환이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러 가던 중 부산에서 병이 들어 48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당시 첨성촌(현재의 일동)에는 실학의 거목인 성호 이익이, 북쪽의 부곡동에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던 표암 강세황이 계셨다. 김홍도는 7~8 세부터 20여세까지 이곳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 선생으로부터 그림과 글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주었던 단원 김홍도는 후에 어진화가(御嗔畵家)로 대성하여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름이 드높다.
2. 김홍도의 삶
이후 행적은 1765년 그의 나이 21살 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경현당수작도>를 제작한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화원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정조 원년인 1777년(33살)때부터 국왕으로부터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규장각 화원과는 달리 대조화원, 즉 국왕 직속의 특급화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발달하여 기예를 사소한 것으로 여겼으며, 화원도 중인들의 직종으로 가장 높아야 종6품에 불과하였다.
29세, 37세, 47세 세 차례에 거쳐 화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왕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44세 때에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절경을 제작하였으며, 46세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원 용주사의 후탱불을 주관하였다.
1791년 연풍현감에 제수되었지만 불미스럽게 파직되어 1795년 한양으로 돌아와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다. 51세에는 임금의 화성(수원) 행차를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와 수원의 경관을 담은 <화성춘추팔경도> 16폭 병풍을 진상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