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헌영 조사자료
- 최초 등록일
- 2013.09.14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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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출신과 교육
2.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입당
3. 국내 공산주의운동
4. 해방 후 조선공산당 구성
5. 좌우합작
6 좌우합작의 추진
7. 역사적 경험으로서의 의미
8 이승만과 분열 후 독자노선
9. 북한에서 남로당 활동
10. 숙청
본문내용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朴憲永)
일제시대 한국 독립운동은 이념이나 사상에 따라서 다양한 세력으로 나뉜다. 특히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박헌영은 일제시기 형성되었던 공산주의의 거두이자 일제시기 내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남측에서는 이승만의 반공정부의 구성에 의해 배척당하고, 6 · 25 전쟁 이후에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정적 숙청 과정에서 매국노, 간첩 등으로 몰리면서 그는 역사에서 잊혀져간다. 비록 교조적이고, 융통성 없는 공산주의자의 교본으로 몰락의 길을 걸은 박헌영이지만, 그의 일생은 단지 그 개인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였다.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또한 조선 민중들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이념이나 사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한 공산주의자로서의 박헌영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박헌영을 택하였다.
<중 략>
9. 북한에서 남로당 활동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呂運亨)허헌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이해 7월 12일 이른바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국면이 전개되면서 9월 6일 미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간부에 대한 검거를 감행하려 하자, 하루 전인 1946년 9월 5일 관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 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뒤 1946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8년 남한에서 단독선거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선거를 실시하여 8월 29일 해주에서 남한선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세력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참고 자료
한국현대정치사 Ⅰ(송남헌, 성문각, 1980)
박헌영(박갑동, 도서출판 인간, 1983)
한국공산주의운동사Ⅰ~Ⅴ(금준엽금창순, 청계연구소출판국, 1986). 〈금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