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춘화도의 개념
2. 춘화도의 등장 배경
3. 춘화의 유입과 쇠퇴
4. 김홍도,신윤복,최우석의 춘화도
5. 중국,일본의 춘화도
6. 한국의 에로티시즘
참고문헌
본문내용
‘춘화도’의 개념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남녀의 성적 교합 양면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춘화도’라 한다. ‘춘화’는 ‘남녀교합지상’이나 ‘남녀상교지형’을 노골적이고 서정적으로 묘사해 춘흥을 즐기거나 최음을 목적으로 그렸다. 이와 같은 그림들은 1800년을 전후로 하여 기방 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적 유흥문화와 밀착되어 종래의 실용적 기능에서 보고 즐기는 감상물로 이행되면서 풍속화영역의 한 갈래로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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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향락용 춘화가 유입된 것은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주된 관심사의 하나인 춘화의 유입이 그 이전부터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밝혀줄 자료가 아직 발견 되지 않고 있다. 단지 원나라 왕실과 밀접했던 고려 왕실이나 귀족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그림들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물론 이때의 춘화는 몇몇 특권층만이 향유했던 외국문화였을 것이다. 본격적인 유입은 청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한창 들어오기 시작한 17~18세기경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인조 년에 중국 사절단의 선물 품목에 상아로 만든 춘희상이 포함되어 있어 돌려보낸 적이 있으며, 숙종 때에는 춘화를 그려넣은 도자기가 중국으로부터 밀반입되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 일본의 춘화가 매우 유행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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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신씨의 아버지 신한평에 이어 화원으로 첨사(僉使)를 지냈다는 사실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아버지 신한평의 출생년대(1726)와 70대까지 공적인 궁중기록화 작업에 참여했단 점으로 미루어, 신윤복은 김홍도보다 후배이고 김득신(1754-1822)과 거의 동년배쯤으로 짐작된다.
연대가 밝혀진 그의 작품도 드물어 더욱 활동시기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신윤복의 풍속화와 풍속화적 성격의 그림은 대부분 19세기초의 작품이다. 주제와 형식적 특징상 김홍도와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평범한 가사일의 여속그림과, 신윤복의 개성미가 물씬한 도회시정을 담은 그림, 여성의 초상화<미인도>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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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인물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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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이조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공간,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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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ckjr.net(동양공전,대진대학교 자료)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이태호 / 여성신문사 / 1998 / 13p~2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