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
- 최초 등록일
- 2005.04.05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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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오농민운동을 전반적으로 정리한 발제문입니다. 고부봉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목차
Ⅰ.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
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2.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부상
3. 동학의 등장과 의미
1)동학의 사상적 뿌리
2)동학의 기본골격과 사회적 위상
Ⅱ. 척왜양운동의 전개
1.공주와 삼례에서
2. 한양과 지방에서
3. 보은, 원평, 밀양에서
Ⅲ. 사발통문과 고부봉기
1. 사발통문의 결의사항
2. 고부봉기
본문내용
Ⅰ.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
19세기로 접어들자 그전부터 성장해오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각 분야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를 지탱해주던 중심적 고리들의 이완, 붕괴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당시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는 봉건지배 계급에 대한 저항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조직적으로 투쟁을 벌였는데 불시에 관료와 지주들을 습격하여 봉건지배계급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19세기로 접어들자 이러한 투쟁은 보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도 최고의 형태를 보인 것으로는 이른바 홍경래란(洪景來亂)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면서 당시 성장하고 있던 사상인(私商人)층과 몰락양반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것은 농민투쟁사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인 1833년(순조 33)에는 쌀값폭등에 대한 도시빈민들의 저항이 서울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상품화폐경제가 도시에서 어떠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을 지나자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은 더욱 빈번하고 강력해졌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주들의 지나친 지대착취와 봉건 말기적 조세수탈에 저항하여 일어난 소 빈농층의 봉기였다.
빈농 유계춘(柳繼春)이 이회(里會)를 열고 통문을 만들어 돌림으로써 시작된 농민봉기는 악질지주와 탐관오리의 집을 부수고 진주로 공격해 들어갔다. 1876년(고종 13)에 강요된 개항을 맞이하자 농촌경제는 더욱 무너져 내렸고 농민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79년에는 울산에서 농민들이 관아로 쳐들어가 관리들을 구타하고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방면시켰다. 1880년 황해도 장련에서도 같은 성격의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1883년 동래에서도 비슷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이러는 사이에 농민봉기와는 달리 명화적(明火賊)이라는 일정한 조직을 갖춘 농민도적떼들이 경향(京鄕) 각지에서 출몰하여 부호의 집을 털기도 하고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전봉준이 반제, 반봉건의 기치를 올리기 전 곧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이 한창 진행되던 1893년, 평안도의 함종, 중화, 경기도의 인천, 개성, 황해도의 재령, 황주, 충청도의 청풍, 황간, 강원도의 금성 등지에서 연이어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봉건정부는 민씨집단의 부패타락한 정치로 인하여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