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한국전쟁의 기원- 1945~48년 사이의 한국
- 최초 등록일
- 2005.08.10
- 최종 저작일
- 2005.08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전쟁의 기원 일부 요약
목차
Ⅰ. 들어가며
Ⅱ. 한국의 분단
Ⅲ. 해방공간에서의 남한
1)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 초기의 협력
2)남한의 좌익과 우익
3)대한민국의 건국
4)제주반란과 여수반란
Ⅳ. 해방공간에서의 북한
1)북한
2)경찰과 정보기관
3)북한이 자주적인 공산주의 국가성립에 성공한 이유
본문내용
한국에서의 민족분단과 남북대립이 형성된 시기는 1943년~53년 사이였다. 두 개의 한국, 파멸적인 전쟁,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재편은 여기서 생성되었다. 미국은 이런 사건들에서 주된 역할을 했고, 여러 면에서 열강들 가운데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나 그 시기의 많은 역사책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1950년에 일어난 전쟁 때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의 분단 및 전쟁을 한반도의 북쪽에 소련을 북에 들어오도록 허용한데에서 찾고 있다. 일본 패망 후 몇 주 내에 표면상의 한국정부가 실제로 존재했었다. 본부를 서울에 둔 이 정부는 8월 중순에 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되어, 9월에는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인민위원회’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9월에 다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미국인들은 이 정부를 기피했다. 이에 비해 소련은 미국인들이 남(南)에 들어오도록 허용했고,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했다. 미국은 1945년 9월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한 망명 민족주의자 집단과 국내의 일부 보수 정치인들을 선호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 개월 만에 사실상 분단되었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미국의 여러 견해는 1945~50년에 대해 기록된 역사문헌을 통해 대부분의 문제들을 소련의 방해와 한국의 정치적 미숙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민족분단은 한국인들이 한 짓이 아니라 미국에게 책임이 있었다.
참고 자료
한국전쟁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