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해방 운동가, 몽양 여운형
- 최초 등록일
- 2006.10.05
- 최종 저작일
- 2006.09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성심성의껏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참고하셔서 좋은 성적 받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울러 자료 구매하시는 분들을 위해 예쁜 레포트표지도 첨부하였습니다. *^^*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왜 몽양 여운형에 대해 쓰고자 하는가?
2. 『나의 아버지, 여운형』의 내용
(1)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 여운형의 활동
(2) 몽양 여운형의 둘째 딸, 여연구
3.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대한 비평
(1)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 여운형의 활동에 대한 해석
(2)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 여운형의 활동에 대한 평가
Ⅲ. 결 론
※ 참고문헌
※ 참고논문
본문내용
Ⅰ. 서론
중의 한 사람으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은 그의 활동에 적절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을 유보시켰다. 냉전체제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민주화의 물결이 이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운형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여운형에 관한 서적 중에서 그의 둘째 딸, 여연구가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중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행적을 조사해보고자 한다. 특히 여러 독립 운동가 중에서 여운형을 택하여 서술하게 된 이유, 1919년부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 동안의 여운형의 활동 그리고 저자인 여연구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또한 저자가 본문에서 주장하는 여운형의 활동에 대한 사실 여부 및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느낀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왜 몽양 여운형에 대해 쓰고자 하였는가?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가(家)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부친의 3년 상을 마친 후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어 버렸으며,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러한 여운형의 행위는 당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인근 양반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의 파괴였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한 편의 영화 같은 그의 일대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여운형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남북 합작 운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평생 조국을 위하여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후 조국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참고 자료
노경채, 「우리 역사 바로 알자-임시정부는 얼마나 독립운동을 하였나」, 『역사비평』겨울호, 역사문제연구소, 1990.
박용규, 「여운형의 언론활동에 관한 연구-일제하 《조선중앙일보》사상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vol. 42, 한국언론학회, 1997.
박찬승, 「1910년대 말 ∼ 1920년대 여운형의 민족해방운동론」, 『역사와 현실』vol. 6, 한국 역사 연구회, 1991.
이기형, 「위기시대의 그리운 사람들 7 : 여운형, 새로운 민족지도자를 기다리며」,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사회평론,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