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장지락)과 아리랑
- 최초 등록일
- 2006.11.14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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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산(본명:장지락)이라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삶과 그와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대한
정리 자료입니다.
목차
1. 출생 및 성장
2. 주요 활동
3. 김산의 죽음과 아리랑
4. 평가
연표
저서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1. 출생 및 성장
- 본명: 장지락(張志樂)
- 가명으로 김산(金山)·유청화(劉淸華)·유한평(劉漢平)·이철암(李鐵庵)·한국유(韓國劉)
·장북성(張北星)·장명(張明)·유자재(柳子才)
필명으로 염광(炎光 )·한산(寒山)·황야(荒野) 사용.
- 1905년 평북 용천에 차산리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출생. 부모는 자작농으로 가난하였다. 형제관계는 큰 형과 작은 형이 있고 그는 셋째였는데 그를 종종 도와주곤 하던 것은 둘째형이었다. 보수적이던 아버지와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11살 되던 해에 김산은 집을 나왔고 둘째형의 도움으로 계속 공부를 하여 기독교계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김산은 무정부주의에 심취했고 삼일운동이 가라앉고 나서 얼마 후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유학생활을 했다.
- 일본에서 고학생활을 하던 김산은 일본을 떠나 당시 신사상의 주 원천이던 모스크바로 향했으나 중도에 신흥무관학교에 머물러 수학하고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서 16세의 김산은 낮에는 독립신문의 한국어 교정계 겸 식자공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한국인성학교에서 영어공부와 에스페란토어, 무정부주의 이론 등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이동휘, 안창호, 이광수 등을 만났다. 의열단에도 가담하게 되는데 의열단에서는 오성륜(吳成崙)과 김약산(金若山=金元鳳)을 만나게 됐다.
- 17세에 김산은 북경에서 만난 김충창 으로부터 3년간 막스-레닌주의를 사사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2. 주요 활동
- 1923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충창 외 8명의 동지와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하였다. 같은해에 북경협회의학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고 이듬해인 1924년 김산, 김충창 외 8명의 동지들이 이르쿠츠크 공산당 지부로서 <북경고려공산당(北京高麗共産黨)>을 창립했다.
- 1925년 김산은 광주에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 대혁명에 참가했다. 1926년에 김충창, 김약산과 분파를 없애기 위한 분파로 <조선혁명청년연맹>을 창립하였고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정치활동 외에도 황포군관학교에서 교단에 서기도 하였고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 10일 광둥코뮌봉기에 참가하여 전선에서 싸웠다.
참고 자료
· 김산, 님 웨일즈, 조우화 역,「아리랑」(경기 파주: 동녘, 2000)
· 이회성, 미즈노 나오끼, 윤해동 외 역,「아리랑 그후」(경기 파주: 동녘, 1993)
· 역사학 연구소 저,「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서울: 아세아문화사, 1997)
· 홍태식 저,「한국 공산주의운동 연구와 비판: 해방전편」(서울: 삼성, 1969)
·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한국공산주의운동사:식민지시대」(서울: 돌베개, 1986)
·「한겨레 신문」 1999년 1월 4일자
·「한겨레 신문」 2005년 3월 20일자
·「한겨레 신문」 2005년 3월 29일자
·「경향 신문」 2005년 5월 23일자
·「경향 신문」 2005년 8월 17일자
·「동아 일보」 2006년 8월 14일자
·「세계 일보」 2006년 10월 14일자
·「국정브리핑」 2005년 8월 25일자
·「국정브리핑」 2005년 8월 26일자
·「아리랑 나라」http://www.arirangnara.com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