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
- 최초 등록일
- 2014.02.24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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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로 보는 현대사 수업 시험 준비를 하면서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쓴 글입니다.
나중에 A+받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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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좌우합작운동은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어 남북분단이 민족 앞에 현실로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소 공위가 휴회되면서 정국에는 크게 3가지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익진영에서 전개하는 자율정부 수립운동과 좌익진영이 총력을 기울이는 미소공위 속개운동, 그리고 중도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좌우 합작운동이 그것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민족분열주의와 국제고립주의는 우리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탁치 수용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좌익진영과 반탁으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우익진영을 동시에 비판함으로써 양 진영에 거리를 두면서 중도적 노선을 취했다. 미군정도 합작을 적극 후원하였다.
6월 14일 여운형과 김규식, 그리고 우익 측의 한민당 총무 원세훈과 좌익 측의 민전 의장단 허헌 등의 좌우합작 4자회담이 열렸고, 이어서 7월 25일 덕수궁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여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이후 좌익 쪽에서는 ‘좌우합작 5원칙’을 내놓았고, 우익 쪽에서는 ‘좌우합작8원칙’을 제시했다. 좌우 양측이 제시한 합작원칙 가운데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을 신탁통치문제와 토지 및 중요산업의 처리 등 경제정책문제, 그리고 친일파 청산문제 등이었다. 좌우 양측이 합작원칙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하는 동안 인민당과 공산당, 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을 발표하고, 미군정청에서 공산당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자, 대구,경북지역에서 10월항쟁이 발생함으로써 합작운동은 한동안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좌우익의 대릭이 심화하는 국면에서도 합작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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