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 최초 등록일
- 2021.02.22
- 최종 저작일
-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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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준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장준하의 생애
2.장준하, 의문의 실족사
1) 운명의 8월 17일 현장
2) 실족사의 의문점
3.장준하 실족사의 진상
1) 장준하의 중대 결행 결심
2) 박정희와 장준하
4. 우리의 자세
본문내용
1.장준하의 생애
장준하는 일제시대였던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6천리를 걸어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중경에 도착해여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를 만나게 된다. 그는 1945년 8월 중국 시안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때문에 <사상계>는 폭넓은 독자층을 구성하게 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사상계>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과 5.16쿠데타, 한일굴욕협상에 대한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그로인해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3권 위에 군림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래서 장준하는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참고 자료
없음